음악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대했던 영화였다. 최근에 많이 감성적이어서 꼭 이 영화를 늦은 밤에 보고 들으면서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우연처럼 정말 늦은 밤에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몰입하지 못했었다. 여럿이서 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 날 나의 무드가 음악에 젖거나 스토리에 이입할 무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기대가 컸을 뿐 분명 좋은 영화였다. 이 감상문에는 스포일이 다소(?) 포함되어 있다.

내가 인상 깊게 본 장면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여주인공 그레타의 남자친구 데이브가 출장을 다녀온 후 선물해 준 곡을 듣다 말고 뜬금없는 기똥찬 싸다구를 날리는 그레타의 모습이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날아간 그 싸다구는 여자의 직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남자친구가 선물해 준 사랑의 노래를 듣고 단 번에 다른 여자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아채는 감각이란. 비단 여자의 직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대상의 작은 변화들, 가령 눈썹의 묘한 움직임이라던가 음정의 불안정 같은 것들을 쉽게 캐치해 낼 것이다.

또 다른 장면은 헤어진 후 그레타가 데이브에게 메세지콜로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다. 그토록 사랑했지만 한 순간에 바람이 나버린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어떤 심경이었을지 어렴풋이나마 난 상상해 볼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내가 만약 그레타였더라면 손쓸수가 없고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허무해하며 한 동안 절망에 빠져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레타는 멋지게, 또 그녀답게 복수 아닌 복수를 했다. 아무래도 사랑했던 사람에게 욕을 퍼붓는 것도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킴으로써 문제를 정리하는 방법 중 하나이지만 진정 사랑했던 사람에게 그러기는 정말 힘든건가 보다. 그레타의 노래는 원망과 허망함을 노래할 뿐 그들의 추억까지 더러운 것들로 만들어버리진 않았는데, 그런 모습이 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그렇게 바보같이 그놈을 사랑했던 것 같다. "Like a Fool"이라는 음악의 제목처럼 말이다.


Like A Fool ( Begin Again OST )

계속 안타까운 장면만 이야기 했는데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장면도 많았다. 그 중에는 당연 자신의 음반회사에서 쫓겨나 그레타를 프로듀싱하는 댄과 그레타, 그리고 열정과 꿈을 쫓아 모인 멤버들의 환상적인 잼들이다. 거의 모든 잼들이 멋진 곡과 연출, 감동을 수반했지만 그 잼들 중 최고는 댄의 딸 바이올렛까지 합류했던 "Tell Me If You Wanna Go Home"이라는 곡의 잼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지내던 바이올렛의 묵은 상처가 이 곡을 통해 완전히 치유된다.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고 싶은 마음에 야하게 옷을 입고 몰래 일렉기타를 연주하던 바이올렛이 옷을 고쳐 입고, 일렉기타를 들고 잼에 왔다. 곡의 중반까지는 빼면서 자리를 지키지만 녹음 도중에 모든 밴드 멤버들이 중요한 곡의 핵심 부분을 그녀를 위해 비워두자 끝내 못이기는 척 연주를 시작하는데 정말 환상적인 싱글이었다. 그 절정에 이버지 댄이 갑자기 베이스를 들고 딸 앞에 마주서며 즉흥적으로 호흡을 맞추는데, 그 장면은 내 안에 있던 상처까지 녹아내리게 하는 것 같았다.


Tell Me If You Wanna Go Home(Begin Again OST)

이 외에도 언급하고 싶은 장면들이 많았다. 관계 회복을 원하는 데이브의 초대로 갔던 그의 콘서트 현장에서 끝내 인기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그에게 실망하는 그레타, 댄이 깔아놓은 복선대로 끝내 명성을 버리지 못했던 데이브, 데이브와 그레타 둘 만의 음악이 대중 앞에서 대중화되어 불러졌을 때 퇴색되었던 특별함과 그것을 보고 슬퍼했던 그레타 같은 씁쓸했던 장면들과, 길거리의 소음과 떠드는 아이들마저 멋진 음악으로 재탄생하는 모습, 퍼블리셔의 어이 없는 요구 사항을 단방에 차고 나오는 그레타, 그렇게 고생해 만든 앨범을 단 돈 천원에 내놓는 쿨함을 보이는 댄과 그레타, 그리고 그게 또 성공으로 이어지는 장면들 모두 자연스럽고 감동이었다. 음악도 스토리도 메세지도 훌륭했다.


Lost Stars(Begin Again OST)

내가 느꼈던 이 영화의 메시지는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라"이다. 댄과 그레타는 메시지의 형상화이고, 바이올렛은 아니었다가 그렇게 변화한 사람이며, 데이브는 그렇지 못했던 사람이다. 데이브는 물론 성공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평생 타인의 시선에 묶여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할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되고 싶은 사람보다 타인이 좋아하는 모습의 사람이 될 것이고, 그게 데이브의 앞으로의 운명이다. 난 그걸 성공자라기 보단, 화려한 노예라고 하고 싶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고 Carl R. Rogers가 말했듯,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음악, 자신의 영화, 자신의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심이 아니고, 진심이 아닌건 예술이 아니다. 진정한 예술 속에서 사람들은 그저 그런 감동이 아닌 진정한 감동을 받는다. 마치 영화 첫 장면에 펍에서 그레타의 잔잔한 곡이 떠들어대는 관중들을 스치고 지나가 지하철로 뛰어들려 했던 한 천재 프로듀서의 마음을 돌려놓았던 것처럼. 예술인의 마음은 그걸로도 충만하다.


A Step That You Can't Take Back (Begin Again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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